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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시대에, 한국의 운명을 우리가 결정하자.

"우리의 미래는 바로 우리의 가슴과 머리와 손에 있다"

조영환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5/12/03 [13:29]

불확실성의 시대에, 한국의 운명을 우리가 결정하자.

"우리의 미래는 바로 우리의 가슴과 머리와 손에 있다"

조영환 칼럼니스트 | 입력 : 2005/12/03 [13:29]
<한국호>는 지금 번영의 대양을 향해 달리는가, 아니면 침몰의 대양을 향해 달리는가? 오늘날 정보화시대에 모든 정보와 지식이 더 신속하고 정확할 것이라고 가정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못하다. 정보와 지식이 일률적이 되지 않으면서, 매사에 대한 판단도 다양하고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한국의 미래는 낙관적인가 아니면 비관적인가? 뭔가 불안해 보이는 듯한 한국의 장래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누구도 할 수 없다. 단지 ‘한국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만이 확실하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도 살고 있다.

정보와 지식이 홍수처럼 쏟아지니까, 만사에 대한 판단은 쉬워 보인다. 하지만 인쇄에 의존한 오프라인 시대보다 인터넷에 의존하는 온라인 시대에 사안이나 사건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더 내리기 어렵다. 빛의 속도로 신속하게 현장을 전달하는 방송정보에는 어느 매체보다 더 허위나 오류가 적을 것이라고 믿기 쉽다. 하지만 현장 화면들로 연속되는 방송 뉴스보다 더 쉽게 대중들을 속일 수 있는 매체도 드물다. 하버드의 하비콕스 교수는 ‘선명한 화면으로 보는 방송정보보다 더 불분명한 것은 없다’고 강의했다. 종종 방송은 잘못된 지배자들에 의해서 우민화정책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신속한 정보를 보도하는 매체는 종종 판단에 혼란을 준다. 최근 황우석 교수의 업적에 대한 평가나 이건희 회장의 딸에 대한 사망원인도 신속한 방송보도로 인하여 오히려 혼란스럽게 되었다. 신속한 언론보도는 혼란의 주범으로 등장하면서, 이제 어느 것이 진실인지 어느 허위인지 구별하기 어렵게 되었다. 개인적인 사안들에 대해서도 판단하기 어려운 일들이 늘어나지만, 국가나 집단에 대한 판단도 매우 불분명해졌다. 이러한 판단혼란의 한 원인으로 이념과 종교와 같은 거대한 배후판단기준이 사라진 것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판단의 기준을 상실한 후기현대사회에 살고 있다.

서민들은 어렵다고 야단인데 정부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는 상황에서, 우리나라와 우리들의 장래를 판단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12월 2일에 한국의 연간무역량이 5천억 불을 넘기고, 주가가 1300을 넘긴다고 한국경제가 좋아지는가? 아니면 현재 가계당 평균부채가 3,300만원에 육박하고 노무현정권이 떠날 때에 국가부채가 500조가 되어 한국경제는 더 어려워지는가? 지나간 분기들에서 실질국내총생산(GDP)은 평균 4%대로 성장했는데, 실질국민소득(GDI)은 0%대로 제자리걸음 쳤다는 한국은행의 통계가 12월 1일 발표되었다. 국가경제의 수치는 그럴듯한데, 중산층 국민들은 한국경제가 심하게 몰락한다고 느낀다. 노대통령의 장밋빛 전망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의 붕괴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경제뿐만이 아니다. 한국의 모든 분야에서 대충 본다면 장밋빛 전망도 내놓겠지만,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국의 장래는 먹구름이 끼어있는 것 같다.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 사회, 문화, 교육, 윤리적 측면에서도 한국은 장래가 밝지 않는 것 같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발전보다는 후퇴의 징조들을 많이 보여준다. 한국인들은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응전의지가 사라지고, 한탕주의와 허무주의에 젖어있다. 공공의 과제들을 자기 일처럼 고민하는 자들이 바보가 되는 ‘복지부동의 허무주의’가 사회에 만연되고 있다. 한국인들은 나라도 가정도 자신도 없는 허무주의에 빠져들고 있다. 한국의 장래를 우울하게 하는 요인들을 좀 살펴보자.

먼저, 애국심이 없는 한국인들이 늘어났다. 병역의 의무를 당연히 필하려는 연예인이 영웅대접을 받을 정도로 국가관이 허물어졌다. 국가를 위한 충성은 사라지고 무책임한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국가에 대한 충성의 퇴조는 국가조직을 악용한 정치인이나 행정가들 때문이기도 하다. 국가 단체를 공적 의무보다는 개인 사업으로 착각하는 단체장들이 많다. 지역이기주의를 애향심으로 둔갑시켜서 정당한 국책사업에 대항하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이 번창하고 있다. 국가나 주민은 생각하지 않고 축제에 재정을 낭비하는 망국적 단체장들이 많다. 번창하는 지역 축제들은 사실상 단체장의 사리사욕에서 촉발된 경우들도 많다. 축제로 망해가는 나라가 한국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정가들이 망국적인 낭비성 축제들을 즐긴다.

둘째 내 가정이 필요 없는 줄 아는 한국들이 많다. 살아가는 여건이 변화되고 가정의 중요성에 대한 교육이 약화되어 가정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선택적인 것으로 전락하였다. 특히 젊은 직장 여성들에게 가정은 자기성취에 걸림돌로 취급되는 경우가 흔하다. 우연을 가장하여 가정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방송드라마가 필연적으로 계속 돌려지고 있다. 옛날에는 여성의 자기완성에 가정과 자녀출산은 중요한 요소가 되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가정과 출산의 중요성이 약화되면서, 국가는 인구감소를 겪고 국력은 약화되는 것이다. 가정에 대한 소속감의 약화는 국가에 대한 소속감의 약화와 직결될 수 있다. 정부가 대책마련에 나설 정도로 저출산으로 한국의 장래가 어둡게 만든다.

셋째, 내 직장에 대한 소속감을 갖지 못하는 노사관계와 고용문화가 만연하다. 미국식 연봉제도가 한국에도 정착하면서, 아시아적 평생직장의 개념은 모든 사기업 영역에서 사라졌다. 해마다 고용을 재계약하는 노동자들은 자기 직장의 연속성에 질문을 갖게 되어 자신이 일하는 직장에 소속감을 가질 수가 없다. 따개비처럼 자기 직장에 붙어서 평생 봉사하던 충직한 직업관은 이제 바보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그 대신 자신의 능력을 달팽이처럼 짊어지고 여기저기 떠다니는 직장인들이 많게 된다. 심지어 성공한 한 기업의 직원들이 연말마다 전원 사표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야기가 한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평생직장이란 동양적 개념의 붕괴로 개인들의 능력은 증가할지 모르지만, 국가의 중간조직인 직장에의 소속감이 약화되고 있다.

넷째, 윤리와 도덕을 무시하는 국민들이 많다. 한 국가가 유지되는 정신적 축은 역시 윤리와 풍습이다. 공동체에 대한 자벌적인 의무를 부추긴 윤리가 사라지고 있다. 한민족 국가를 유지시킨 동양윤리를 대체하여 우리에게 아주 이질적인 서구사상이 지배한다. 공사의 구별없이도 국가가 운영되는 우리나라의 전통은 공사가 선명하게 구별되는 서구의 사회윤리로 대체된다. 서구의 시민문화가 정착되는 과도기를 겪는 한국은 일시적르로 윤리의 부재현상을 겪는다. 특히 성윤리가 완전히 붕괴된다. 한국의 전통윤리를 붕괴시키는 일등공신은 역시 영상매체이다. 한국의 방송에서 불륜관계와 애정행각은 일상사가 된다. 케이블 방송에서는 벌거벗은 남녀가 태연히 방영되고, 신문의 홈페이지에는 섹스에 대한 정보들이 홍수를 이룬다. 한국인들의 행동규범을 유지시키던 도덕에 대혼란이 왔다. 정신적 뼈대인 윤리가 무너지면, 국가체제도 무너질 수 있다.

다섯째, 국가와 가정과 직장과 의식에 대한 소속감을 상실한 한국인들은 드디어 자신에 대한 의식마저 잃게 되었다. 자신마저 감당하기 어려운 한국인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실용주의적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이란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과 처한 상황들을 포괄하는 자의식이다. 자기 주위의 것들을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자신마저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와 가정과 직장을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는 개인주의는 결국 자신마저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는 자학을 선사한다. 나에게 주어진 만물들이 나의 관심과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애타정신이 결국 자기애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타심을 잃은 한국인들은 자기애도 잃게 되었다. 국가라는 거대조직이 굴러가기 위해서는 개인을 넘어선 윤리와 사상이 필요한데,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개인 초월적 윤리는 쇠퇴하고 있다.

여섯째, 위에서 언급한 한국인의 의식적 문제 이외에, 한국의 정치영역 특히 국제정치영역에는 문제가 많다. 한국에서 가장 미개한 영역은 역시 정치영역이다. 오랜 식민지생활을 통해서 한국인들이 성숙시키지 못한 영역은 바로 정치영역이다. ‘한국 경제가 이류라면, 한국정치가 삼류’라는 농담은 일리가 있다. 한국인들의 일하는 능력은 대단하지만, 열심히 일한 작업성과를 정치로 수렴하는 마지막 작업에 한국인들은 아주 서툴다. 특히 국제정치게임에서 한국인들은 아주 서툴다. 아직도 6자회담이니 뭐니 하면서, 한국의 운명을 주변강대국들이 농단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없는 수치이다. 한국의 운명을 주변강대국에게 농락시키는 강대국은 한국인들에게 악업을 쌓고 있다. 주변강대국들에게 농락당하지 않는 자주적 외교에 한국의 운명이 달려있다.

일곱째, 한국의 국내정치도 한국의 장래를 별로 밝게 전망하지 못하게 한다. 한국의 여당은 여당으로서의 기초적 자세도 취하지 못하고 있으며, 야당은 야당으로서 최소한의 역할에도 무능하다. 씨족과 지역공동체에 충성하여 한민족국가를 유지해오던 한국인들에게 이념과 사상에 충성을 바치라는 정당의 결성이란 처음부터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더욱이 냉전시대의 정당이념이 사라지는 이 시기에, 정당의 결집력은 더욱더 약화될 것이다. 해방 직후에는 반공당과 공산당, 그 다음에는 독재당과 민주당이나 전라도당과 경상도당이라는 망상에라도 사로잡힐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어떤 명분으로 정당이 형성될까. 더욱더 특정인의 정당이 번성할지도 모른다. 박정희당, 전두환당, 김영삼당, 김대중당, 노무현당, 그리고 누구의 당은 연속될 것이다. 한국정치의 우울한 전망은 바로 한국정당사의 우울한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여야의 선명한 역할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여덟째, 한국의 교육은 한국의 장래를 우울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보인다. 한국의 교육은 일정한 기술을 학생들에게 주입시켜 줄지는 몰라도 창의적인 인재들이 발굴되기에는 여전히 큰 장애물이다. 중고등학교의 인문사회분야 교육에서 획일화된 정답을 강요하는 시험제도는 한국인들의 창의적 발상과 다양한 의견을 억압하는 지옥훈련이다. 정답이 아니면 주눅이 들게 하는 가장 중요한 심리적 장치를 심어주는 것이 바로 한국의 획일적 대답을 강요하는 교육이다. 대답하는 자의 상황과 시각을 무시한 주어진 정답 앞에 학생들의 다양한 대답이 무참하게 부정되는 중고등학교 교육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범죄이다. 교사와 학생들의 인격을 무시하는 획일적 교육은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쇠사슬을 감아놓는 훈련이다. 맹목적인 교육과 맹신적인 종교로 한국사회가 망한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아홉째, 한국사회는 불필요한 이념분쟁도 불안의 요소이다. 이념분쟁의 종식을 위해 좌파의 종식을 요구한다. 북한식 전체주의적 좌파사상은 이미 종식선고를 받은 것인데, 북한식 좌파사상에 아직도 찌든 세력을 종식시키는 것이 바로 이념분쟁의 종식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우파들도 혁신을 요구받는다. 한국에서 좌파가 먹혀들어가는 첫 번째 취약점이 바로 외세종속적인 우파의 사고방식이다. 강대국에 무조건 예속되는 우파의 식민지근성이 좌파가 스며들게 하는 비상하수구였다. 한국에서 이념분쟁을 종식시키는 우선적 조건은 자주적 의식을 갖춘 진정한 보수세력의 등장이다. 사라질 낡은 좌파를 욕하기 전에 쓸만한 우파세력을 국민들에게 제시하라. 게으르고 낡아빠진 수구세력은 재바른 좌파가 기생하게 하는 밑거름이다. 지역주의에 잠자지 않는 활기있고 자주적인 우파세력의 등장이 한국의 장래를 밝게 만들 것이다. 앞으로 건강한 우파사회를 한국은 지향해야 한다.

혹자는 현재 한국의 상태는 구한말의 상태와 같다고 주장한다. 동의하고 싶은 주장이다. 국가경제의 주도권은 외세의 손에 있고, 지도자들의 판단은 혼미하고 무책임하며, 국민들의 애국심은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소 대책 없이 무작정 외국탈출을 시도하는 한국인들이 소리 없이 많다. 도덕과 경제에 축이 무너진 남한사회의 혼란은 쇠퇴하는 북한의 혼란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정신을 다잡고 빼앗긴 경제주도권을 되찾아서, 자주적인 국가 보수에 다수 국민들이 매진하면, 병든 좌파들은 저절로 사라진다. 햇빛이 좋은 곳에 곰팡이가 사라지듯이, 망국적 좌파의 퇴출은 건강한 우파의 번성으로 자연스럽게 가능한 것이다. 한국사회의 문제는 불임 우파가 번성하고 건강한 우파가 부재한다는 데에 있다.

한국의 장래에 대한 판단은 계량적인 예측이나 좋은 정보에 달려있지 않고, 바로 오늘 우리들의 각오에 달려있다. 정보화시대에 쏟아지는 정보와 지식에 떠밀려 갈 필요가 없다. 우리들의 정신자세와 각오가 우리나라의 장래 운명을 결정한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외국의 정보공작에 놀아날 필요가 없다. 푸코의 주장처럼, 모든 정보와 지식은 조작된다. 황우석과 이윤형에 관한 많은 언론의 정보들에 같이 떠가면서 놀아나지 말자.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우리의 미래는 바로 우리의 가슴과 머리와 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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