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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의 환상은 깨지고 있는가

서지홍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6/10/24 [15:38]

박근혜 정권의 환상은 깨지고 있는가

서지홍 칼럼니스트 | 입력 : 2016/10/24 [15:38]

한때 헌정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불리던 박근혜 대통령은 여러 겹의 환상 속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카리스마와 육영수 여사의 후덕함을 물려받은 양친에게 투시되었던 환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걸로 착각을 하고, 아마도 역대 최고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모든 사람들은 환상에 젖어 있었다.

 

경제성장과 독재로 요약되는 아버지의 정치력과 자애로운 이미지가 풍겨오는 육영수 여사로 인해 독재성이 중화되고, 경제성장의 가능성을 환상으로 바꾸어 박근혜 정부의 밥상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의 양친은 모두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나 우리 모두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를 측은해하고, 아버지 경제성장으로 인한 무엇인가 보답해줘야 한다는 논리로 박근혜 대통령에게 표를 몰아주는 착각아닌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것이 환상이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다. 동생들도 있지만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의 동생들을 한 번도 청와대로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 친인척비리에 깨끗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내게 자식이 있기를 하냐.”며 “국가와 결혼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과거 정권에서 친인척의 비리에 신물이 나있는 국민에게 가장 환상의 너울을 씌워주었다. 가족도 없는 사람이 사심(私心)을 의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처럼 우리 국민들은 박 대통령을 믿었고 박 대통령 만큼은 깨끗한 대통령임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래서 이명박 전 대통령에 실망한 국민들은 그것마저 커다란 환상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환상은 무너졌다. ‘국민행복’은 말잔치였고, 그 대신 ‘헬 조선’이란 말이 시중에 회자되기 시작했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가차 없이 찍어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독재 없는 성장이 아니라, 성장 없는 독재라고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세월호 사고 발생 때 팽목항을 찾은 대통령은 유가족들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의 슬픔을 겪어봐 잘 알고 있다.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실지 가슴이 메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후의 행동은 말과 달랐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 그를 국민들은 안쓰러워했고, 대통령이 되면 그 한을 풀어 국정을 따듯한 정으로 베풀어 가리라 믿었다. 그렇게 기다린 집권 4년차를 맞아 우리가 기대했던 마지막 환상마저 깨지고 말았다.

 

돈 같은 것엔 관심이 없었을 줄 알았던 그에게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많은 국가기관과 그 많은 재벌, 그리고 명문이라 일컫는 이화여대까지 나서서 대통령의 친딸이라 해도 다름없는 대우를 했으며 총장을 비롯하여 학장, 담당 교수까지 일개 학생에 불과한 정 모양에게 깍듯이 공대하면서 특혜를 주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모든 것이 최순실 블랙홀에 빠져 공직사회에서도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며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 드디어 갤럽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도가 25%로 역대 최저치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대통령은 여론에 연연하지 않겠다며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임무에 열중하라 말씀하셨다. 국민의 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명확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국민과 소통하고 남은 임기를 무사히 국정에 임하겠다는 것보다. 비평의 소리를 아예 외면하고 ‘내 갈길 간다.’ 는 말과 같다. 누가 말릴까. 시작의 창조경제는 매력적이었다. 허상을 쫒는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정책은 없다. 문명이 인류 독창성의 산물이듯, 오늘의 난제를 푸는 데도 창조정신에 기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자리, 복지, 제자리걸음 성장, 양극화 문제를 어찌 이론이나 말로 해결할 수 있겠는가. 무한성장을 꿈꾸다 한계에 부닥친 듯, 힘겨워하는 모습이 역력한 자본주의 체제 역시 창조적 변신을 통해 그 활로를 열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의 ‘창조경제론’이 충분히 영글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다만 그 취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정보통신기술의 활용, 발상의 전환, 새 산업의 창출, 생산성의 혁신, 창의적 사회 기풍 등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창조적 혁신을 통해 경제는 물론 국가 기반을 탈바꿈하는 것을 꿈꾸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그 꿈을 누가 탓하랴. 다만 그 혁신은 지도자의 탁월한 통찰력과 헌신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역사는 말한다.

 

특히 역사적인 혁신의 성취자들은 하나같이 ‘자기 혁신’에 치열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스스로 갈고닦고,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했다는 점에서 예외가 없다. 박 대통령이 지향하는 ‘창조 시대’의 열쇠는 대통령 손안에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그는 엉뚱한 곳에서 열쇠를 찾고 있다. 새 시대는 참신한 사람, 새로운 기풍이 넘칠 때 절로 열리는 법인데 낡은 사람이 판치고, 음울한 기운이 감도는 땅에서 결코 혁신은 꽃필 수 없고 창조경제를 펼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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