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현재 문무대왕릉은 '허묘' 가미새바위가 진짜 무덤"세계전통해양문화연구소 김성규 소장, 이견대(利見臺) 새 위치도 발견 연구결과 공개
이같은 주장의 주인공은 세계전통해양문화연구소 김성규 소장(좌측 사진)이다. 김 소장은 현재 문무대왕릉 아래 500미터 해안의 ‘가미새바위’를 문무대왕릉으로, 그곳에서 80여m 위의‘당수깨언덕’을 이견대라고 했다.
김 소장은 "현재의 대왕암과 이견대는 부실한 조사와 거짓 주장으로 선정됐다고 했다. 현재의 문무대왕릉이 문무대왕릉이라고 인식된건 불과 50여년 전인 1967년, 당시까지는 괘릉이 문무왕릉이라고 여겨 괘릉 앞에 '문무대왕릉'이라고 표지석까지 세워두었었지만 뒤늦게 괘릉은 원성왕릉이라고 고쳐 졌다."고 했다.
문무대왕릉은 1967년 5월 신라오악조사단에 의해 허술한 현장 조사와 임의적으로 선정한 결과가 현재의 문무대왕릉이라는 것이다.
김 소장에 따르면 "정영호, 김원룡, 김기웅 등 3명의 당시 교수들로 구성된 신라오악조사단은 사실과 다르게 현재의 해중릉 바위를 대왕암이라 주장했다."고 했다. 예를들어 복개석이 외부에서 가져온 것이라 는 주장과 복개석 아래에 장대로 찔러보니 6m 넘는 용굴이이 있어 유골상자를 넣었을 만한 깊이가 있었다"라고 한 것 등을 거짓 주장의 이유로 들었다.
김 소장은 "2001년도 'KBS 역사스페셜' 에서 1967년 당시 오악조사단의 한명이었던 정영호교수는 1967년 5월 15일 오전 10시에 김원룡·김기웅 선생님과 함께 해중 능역(陵域)에 들어가 3t 무게의 복개석(覆蓋石) 밑에 용혈(龍穴)이라 칭할 수 있는 큼직한 암혈(巖穴)이 있음을 확인, 길이 6m가 넘는 대나무 장대가 다 들어가도 모자람을 알게 되었다. 5월 중순 동해수(東海水)는 역시 냉기로 몸이 떨렸으나, 흥분된 1시간의 작업을 끝내고 나니 오히려 훈기가 들었다고 밝혔었지만 이 내용은 완벽히 기만 수준의 거짓임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드러났다"고 했다.
'KBS 역사스페셜' 은 당시 보도에서 현재의 문무대왕릉의 물을 다 퍼낸 뒤 초음파 조사까지 했지만 복개석이 아닌 현장의 자연석인 것으로 밝혀 지기도 했다. 복개석은 오악조사단의 주장처럼 외부에서 가져온 것도 아닌 현장에 있던 그대로의 돌이고, 그 복개석 밑에 있다던 6m여 깊이의 용굴은 발견하지 못했다.
이를두고 김 소장은 "학계에서는 현재 대왕암 바위를 '전 문무왕릉'이라고 부르거나 문무왕을 추모하는 '허묘'로 보는 사람들까지 있다."고 했다.
김 소장은 "문헌기록상 그 위치가 문무대왕릉과 연계되어 있는 현재의 이견대(利見臺) 자리와 정각의 위치도 현재의 자리와 위치가 아니다"라고 했다. 대종천 하구 해변 기슭에 자리잡고 이견대는 1970년대에 그곳의 밭을 발굴, 명확한 근거도 없이 건물지만 확인돼 1979년 세운 것"이라며 "문무대왕릉과 이견대는 현재의 대왕암에서 500여 m 남쪽 해변에 위치한 가미새바위와 당수깨언덕"이라고 주장했다.
이견대(利見臺)는 '삼국유사'에서 신문왕 때 감은사 앞바다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는 작은 산이 바다에서 떠 오고 있었다'는 그 현장을 목격한 곳에 지은 누대를 말한다.
이에대해 김 소장은 "감은사 인근 사적 159호 이견대(利見臺)는 결국 허술한 조사에 의한 임의로 세운 건물로 현재의 이견대 위치가 신라 신문왕이 찾아왔던 이견대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이라면서 "본래의 이견대는 더 가까운 해변에 있었을 것이라는 해변설과 현재의 이견대 뒷 산상에 있었을 것이라는 산상설 등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현재의 대왕암 남쪽 500미터 해안의 작은 바위 언덕(주민들은 ‘당수깨’ 또는 '서낭깨'라 함)이 누각을 지어 바다를 가까이 내려다 보기 쉬운 곳으로 본래 신라시대 이견대였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면서 "바위 절벽으로 된 ‘당수깨언덕' 아래 80m 정도 거리의 바닷가에는 주민들이 ’가미새바위‘라고 칭하는 수중 바위가 있다. 그것이 문무대왕릉이라고 주장했다. 이들 두 장소가 서로 연계된 문무대왕릉과 이견대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280 걸음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말하는 '70보(步)'와 편차가 크다. 그러나 세종 때의 1보(步) 거리는 현대 개념의 1보 거리와 다르다. 현재의 한 걸음은 30cm 정도다. 따라서 280 걸음은 세종 때 70보(步) 거리와 일치하는 거리가 된다. 세종 때 1보(步)는 120cm 정도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에서는 고대로부터 성인 남자의 한 걸음을 1 규(跬)라고 하고 두 걸음을 1보(步)라고 하여 약 60cm를 1보(步)로 보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주역'의 영향인지 주나라의 주척(周尺)을 기준으로 1보(步)를 표기했다. 즉 약 19.5cm 정도 길이의 1 주척(周尺)으로 하여 6척 4촌의 길이를 1步라고 했다. 대략 잡아 조선시대 주척(周尺) 기준으로 1보(步)는 6 주척(周尺) 즉 120 cm가 된다. 그러니까 현재 걸음 폭 4보에 해당하는 것이 세종 때의 1보(步)"라는 것.
“거북의 머리 같은 산 위의 한 줄기 대나무”를 볼만한 거리에 이견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 이렇게 볼때 당수깨와 가미새 바위는 본래의 이견대와 문무대왕릉이었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지게 된다는 주장이다.
김 소장은 "우선 가미새바위는 현장을 보기만하여도 '대왕석'이라는 위용을 느끼게 하는 독립된 거암이 수중에 솟아 있는 것에 압도된다."며 "가미새바위는 거대한 남근 귀두를 닮은 대왕석 바위로 바닷물이 출렁대는 그 주변이 여근을 닮은 바위가 5-6m 가에서 둥글게 U자 형태로 둘러 싸고 있는 남녀 음양 합궁 바위 모양을 하고 있는 신비하게 생긴 곳"이라며 "무덤이 명당이 되기 위해서는 왕생을 기원하는 대지지모의 혈자리 즉 음부 지형에 선정했다. 이는 다시 태어나기를 희원하기 때문으로 무덤 앞 망주석을 남근을 닮게 만들어 세우는 것도 그러한 음양 왕생을 바탕하고 있다."고 했다.
김 소장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문무대왕의 유언에 의하여 "동해바다 대석상(大石上)에 장사했다. 속전에는 '왕이 용으로 화했다 하여 그 돌을 대왕석(大王石)이라 한다'"며 "가미새바위는 거북이 귀두상을 하고 있는 단독 거대 암석으로 현재의 해중릉의 여러 갈래 바위 섬과는 달리 가미새 바위는 그 거대한 남근 바위의 위엄이 단일 바위로 대왕석(大王石) 또는 대석(大石)이라 하기에 적합한 바위"라고 강조했다.
김 소장은 "가미새바위를 문무대왕릉으로 추정하는 또다른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한반도 해안지대의 여러 해신당이나 서낭당의 경우처럼 밀물 때는 섬이 되고 썰물 땐 바닷길이 생겨 육지가 되는 이른바 조도(潮島 tidal island) 지형의 하나이기 때문이며 조도(潮島 tidal island) 지형의 섬은 보통 도서(島嶼)라 할 때 작고 낮은 해변의 섬인 서(嶼)에 해당한다. 서(嶼)는 글자 뜻 자체가 가마와 같은 작은 산이라는뜻으로 보통 '파도에 따라 해변으로 다가오는 움직이는 섬'으로 인식되어 결국 사람이 걸어들어갈 수 있는 '산(山)'으로 여겼다."고 했다.
김 소장은 "'삼국유사'에 만파식적의 대나무를 베고 나올 때를 山與龍忽隱不現 원문을 해석할 때 흔히 "산과 용은 갑자기 모양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라고 번역하는데 삼국유사가 필사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嶼이 山+與로 분자되어 내려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山與龍은 본래 '嶼龍(서용)'으로 가미새바위 모양 그대로 "떠다니는 섬이자 거북머리 모양의 바위" 또는 외뿔고래 자체를 의미한 서용(嶼龍)"이라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산 모양은 마치 거북머리 같이 생겼다(山勢如龜頭)"라고 한 것은 '嶼(바위섬)와 龍(거북머리)'의 혼합 이미지를 묘사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산에 신문왕이 들어갔다(入其山)"고 한 것도 배를 타고 간 것이 아니라 찰방거리는 얕은 모래둑길(causeway)로 연결된 해변의 조도(潮島 tidal island) 지형의 낮은 섬인 서(嶼)에 들어갔다는 것으로 가미새바위가 적격"이라고 주장했다.
"가미새바위는 거북머리 즉 귀두를 닮아있기까지 하여 "그 산의 머리는 거북머리 같고(山勢如龜頭)"라고 묘사한 '삼국유사'의 기록에 충족하고 있다." 덧붙였다.
김 소장은 "조도(潮島)라 함은 거북이나 고래처럼 숨쉬는 짐승이 육지와 바다 양계를 왕래하는 상징의 해변 섬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용궁에 들어가는 곳으로 인식되어 서낭당을 그 위에 세우고 신을 모시기도 했던 것이며 동해바다 대석상(大石上)에 장사하였다"라는 말은 가미새바위와 같은 조도(潮島) 바위섬 위에 풍장을 했을 수도 있고 그런 바위 대왕석 아래 산골했을 수도 있다"고 해석했다. 이랑 이유로 가새바위 위와 물밑을 지표조사를 해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 소장은 나아가 "가미새바위가 할매당 위치이고 그 뒷 언덕 당수깨언덕의 서낭당은 할배당 위치 보다 무속적으로 해변에 와 있는 고래 등 또는 거북머리이고, 할배당은 소나무 당목으로 상징되는 산신 언덕이다. 조수의 건만의 차로 걸어들어갈 수 있는 tidal island 서(嶼)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종교적인 성지로 여겨왔다." 며" 동해안 삼척, 해변의 나즈막한 해망산 산상 서낭당을 비롯하여 진도 모도 뿐만 아니라 태안반도 간월암, 안면도 안면암, 인천 실미도, 소야도, 화성 제부도, 서산 웅도, 보령 무창포, 부안 하섬, 남해안의 고흥 우도, 통영 소매물도, 창원 동섬, 여수 사도, 서귀포 서건도 등에서도 이른바 신비의 바닷길(causeway)로 이어지는 조도(潮島) 지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해외의 경우 일본의 조수 간만의 차로 바닷길로 이어지는 에노시마(江の島), 중국 복건성의 쟝공유(建功嶼), 홍콩 마시차우(馬屎洲), 인도네시아 발리섬의 타나롯(tanah lot) 섬, 이란의 나아짜 섬(Naaz islands), 영국의 채널 섬(Channel Islands), 덴마크의 먼도섲(Mandø Island), 프랑스 노르망디의 몽 셍 미쉘(Mont Saint-Michel), 독일의 할리겐(Halligen) 섬, 이일랜드의 카니 섬(Coney Island), 이태리 시실리섬의 이솔라 그란데(Isola Grande), 아이슬란드의 그로타(Grótta) 섬, 스페인의 코르테하다 섬(Cortegada Island) 등 전 세계적으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공통점을 가진 곳이 부지기수"라고 했다.
김소장은 "왕범해입기산(王泛海入其山)이란 조수 간만의 차로 생긴 "신비한 바닷길(causeway)을 지나 산으로 들어갔다"는 뜻이지 배타고 바다 건너 섬애 들어갔다는 뜻이 아니다."며"문무대왕릉은 현재의 대왕암이라는 바다 속의 바위섬이 아닌 거끔씩 조수의 차이로 생긴 바닷길(causeway)이 생길 때만이 물을 찰방거리며 들어갈 수 있는 해변의 조도(潮島 tidal island)여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바다 복판에 있는 현재의 대왕암은 아니며 걸어들어갈 수 있는 가미새바위가 신문왕이 들어간 산"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이유로 "삼국유사는 그래서 신문왕이 왕범해입기산(王泛海入其山)이라 한 것은 조수간만의 차이로 생긴 신비의 바닷길(causeway)로 바닷물을 찰방거리며 걸어(泛海) 그 산에 들어갔다(入其山)고 한 것"이라고 했다.
" '삼국유사' 그 어디에도 배타고 바위섬에 갔다거나 그 산에 상륙했다는 표현이 없고 "바닷물을 찰방거리며 걸어서 산에 들어갔다(王泛海入其山)"고 한 것이다. 육지에 붙어 있어 入其山이라 했던 것이다. 만약 완전히 바다 복판의 섬에 들어갔다면 "入其島"라 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자(使者)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다(使斫竹出海時)"의 出海(출해)도 바닷길로 나왔다는 것이지 배타고 나왔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김 소장은 "신문왕이 오른 산은 무속적으로 해변의 조도(潮島 tidal island)에 해당한다. 현재의 봉길해수욕장 바다 복판의 대왕암은 조도(潮島 tidal island) 현상티 일어나지도 않고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산도 아닌 섬"이라며 "가미새바위 해변 언덕이 무속적으로 당수깨 또는 서낭깨였던 것처럼 가미새바위와 같은 해변의 조도(潮島 tidal island)는 한반도 해안에 많이 내려오고 있어 문무대왕릉은 이러한 가조도(潮島 tidal island) 위치의 가미새바위에 뼈가루와 그 혼을 모신 것"이라 했다.
김소장은 "가미새바위는 외뿔고래가 들어오기에 알맞는 U자 형태의 천연 방파제 구조라서 신문왕이 외뿔고래를 잡아 그 뿔을 잘라 나온곳도 가미새바위로 이곳은 외뿔고래와 같은 고래가 찾아올 수 있는 고래나루로 적합하다. 반면, 현재의 망망대해에 가까운 대왕암 바위 같은 곳엔 외뿔고래는 올 수 있는 지형이 아니다. 피해 들어갈 수 있는 입구도 없고 내부도 공간이 좁다. 즉 현 대왕암은 고래나루가 아니다. 외뿔고래는 빙산처럼 생긴 바위가 들러싼 해변 바위군에 잘 찾아온다.
그렇기에 신라시대 또 한번의 외뿔고래가 잡힌 곳도 해변이라고 했다는 것에서도 신문왕이 외뿔고래를 잠은 곳이 현재의 대왕암이 아닌 해변인 가미새바위임이 증명된다."고 했다.
김 소장은 "신문왕 때 외에도 외뿔고래가 잡힌 증거를 찾아냈다. 즉 만파식적 기사의 외뿔고래가 나타난 신문왕 때인 서기 682년 5월 초하루 때보다 266년 전인 신라 18대 실성왕(實聖王 재위 402-417) 때인 서기 416년 봄 3월에 외뿔고래가 잡혔다는 기록이 그것으로 十五年春三月東海邊獲大魚有角其大盈車 (실성왕) 15년 (416) 봄 3월에 동해 바닷가에서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뿔이 있었고 그 크기는 수레에 가득 찰 정도였다. <三國史記> 實聖王 편>
여기에서 사이즈에서 뿔달린 것에서 실성왕 때 동해바닷가에서 잡힌 큰 물고기가 외뿔고래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잡힌 곳이 동해바닷가(東海邊)"라고 한 것은 가미새바위와 같은 해변이지 해변에기서 수 백 미터 떨어진 현 대왕암같은 바다복판이 아니다."고 했다.
김 소장은 "현재의 해중릉으로 알려진 문무대왕릉은 관광객들이 직접 들여다 볼 수 없어 관광효과가 적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가미새 바위는 한반도 해안지대 해신당 또는 일본열도의 바닷가 외봉우리 섬들의 신사들 경우처럼 밀물 때는 섬이 되고 썰물 땐 육지가 되는 이른바 조도(潮島 tidal island) 지형의 바위섬이라서 신비감과 접근력에서 월등한 관광효과를 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특히 "'日本' 국호의 뿌리는 신라왕실의 日本(해돋이) 바위인 가미새 바위다. 신라의 가미새 바위의 '가미새'가 일본 천왕의 옥새의 숨은 명칭인 가미새(神璽)가 됐고, 일본 이견포(二見浦)의 메오토이와(夫婦岩)의 해맞이 축제의 뿌리가 신라의 가미새 바위가 신라의 향동지일철선의 해맞이 바위라는 것에서 한일 양국의 관광효과를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가미새 바위가 신라인들의 ‘해가 솟는 일출암’의 역할을 하는 해의 뿌리(日本 바위)로 일본 국호의 뿌리가 한국 해안에 있다는 것에도 더욱 흥미를 자아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신라 문무대왕(文武大王, 626년~681년. 재위: 661년 ~ 681년)의 환생으로 여긴 일본 문무천황(文武天皇 재위 697~707)이 신라의 해돋는 '日本(해돋는) 바위'인 가미새 바위를 일본 국호 日本으로 삼고 천황의 국새를 '가미새(神璽)'로 삼았다. 신라의 가미새 바위의 '가미새'가 일본 천왕의 옥새의 숨은 명칭인 가미새(神璽)가 되었다는 것은 신라왕실 문화가 일본 천황가에 영향을 주었던 최고의 상징이 될 것이기에 가미새 바위의 문무대왕릉으로서의 위상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 중에서 가장 강력한 역사 유적을 가지게 될 것이며 코리안으로서 자부심을 국제적으로 드높일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김 소장은 "필자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도 자유이지만, 반대로 당수깨언덕을 이견대로, 그 앞 해변의 조도(潮島 tidal island) 지형의 가미새바위를 새 문무대왕릉으로 문화관광지화해 관련 게시판을 새우거나 사적지로 등록하는 일에 언론과 해당 기관이 나서준다면 필자는 적극적으로 자료 제공이나 관련 이벤트 창출에 협력할 뜻이 있다"고 밝혔다. <저작권자 ⓒ 브레이크뉴스 대구경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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