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30억(국비 15억, 도비 4.5억, 시비 10.5억)의 예산으로 건립되며 사당, 전사청, 강당, 내삼문, 동재, 서재, 누문, 관리사 등 모두 9동으로 구성된다. 올해에는 기존 건물의 철거와 기초토목공사, 각종 설비공사, 사당, 전사청 내삼문 등 제향공간(祭享空間)이, 내년에는 강당, 동재, 서재, 누문, 관리사 등 강학공간(講學空間)이 건립될 예정이다. 서원이 건립되면 그간 제향공간으로만 사용되던 것을 청소년들을 위한 예절전통교육과 시민들을 위한 한문 프로그램 운영, 유림단체의 각종 행사 등 다양하게 활용할 계획이다. 근암서원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따라 훼철된 후 약 130년만에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됐다. 1970년대 초 후학들에 의해 사당과 강당이 복원되긴 했지만 과거의 모습에 비하면 규모면에서 매우 축소되었을 뿐 만 아니라 시설의 일부분이여서 서원의 기능이 사실상 마비였다. 서원을 중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 2006년 12월 지역의 유림들이 모여 근암서원중건추진위원회(회장 채대진)를 결성하면서부터 본격화 되었으며 문경시와 지역유림, 추진위원회 등 몇차례에 걸친 관계자 회의와 보고회를 통해 근암서원 중건시안을 확정했다. 근암서원 소장유물 ○ 문화재명 : 문경근암서원 소장유물 (聞慶近嵓書院 所藏遺物) ▪ 지정일자 : 2006. 1. 2 ▪ 지정종별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 지정번호 : 843점 (일괄) ▪ 소장유물현황 - 교지(敎旨) : 63점 - 첩지(牒紙) : 4점 - 영지(令旨) : 4점 - 전지(傳旨) : 1점 - 증시(贈諡) : 1점 - 청대일록(淸臺日錄) : 12책 (1702숙종28 ~ 1759영조35) 50여년간 일기 - 괴원계첩(槐院稧帖) : 1책 (1712숙종38) - 낙원기영회첩(洛院耆英會帖) : 1책 (1724경종4) - 여사서(女四書) : 4권 1질 (1737영조13) - 어제어필(御製御筆) : 2책 (1744영조20) - 황명대통력(皇明大統曆) : 1질 (영조연간) - 관동팔경, 여산도(關東八景, 廬山圖) : 1질 - 운달산김용사사적(雲達山金龍寺事蹟) : 1질(1700년경) - 어제대훈(御製大訓) : 1질(1755영조31) - 광국지경록(光國志慶錄) : 1권(1744영조20) - 성학십도(聖學十圖) : 1질(1744영조20) - 퇴도선생필첩(退陶先生筆帖) : 1질 - 청대만음(淸臺漫吟) : 1질(1724~) - 근암동상하계안(近嵒洞上下稧案) : 1질(1700) - 학성지(鶴城誌) : 1질(1749) - 제명고적(題名古蹟) : 1질 - 연, 연적, 연함(硯, 硯滴, 硯函) : 1식 - 유서통(諭書筒) : 1점(1724년) - 합죽선(合竹扇) : 1점 -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 133매 (영순면 율곡리) - 목재선생문집(木齋先生文集) : 228매 (영순면 율곡리) - 우암선생문집(寓菴先生文集) : 49매 (영순면 의곡3리, 청산재) - 청대선생문집(淸臺先生文集) : 326매 (산북면 서중리 148-1) 근암서원 배향인물 7인 홍언충(洪彦忠) 자는 직경이요, 호는 우암이며 관은 부림이다. 대제학과 좌참찬을 지낸 연산조 직신 문광공 허백당 홍귀달의 아들이다. 성종 계사년(1473년)에 태어났고, 연산 을묘년(1495년)에 사마시 동년 별시 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 홍문관 정 자를 거쳐 교서 교리를 하다 예조정랑이 되었다 갑자사화(1504년)에 거제도에 유배되었는데 하루는 섬 안에 사사가 있다는 소문이 나서 모두 피하려 창황하였으나 우암 선생 형제는 태연자약하며 말하기를, “군명은 하늘이다. 하늘을 가히 도망칠 수 있느냐.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하였다 한다. 중종반정 후에 풀려났으나 그 뒤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후진을 양성하다 불행히도 36세에 졸했다. 선생은 도학이 높고 엄정 충직하여 후학의 사표로 추앙받았다. 이덕형(李德馨) 호는 한음이요 본관은 광주이다. 중종 신축년(1541년)에 태어났으며, 선조 경진 년(1580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로 벼슬을 하여 경인년(1590년)에 직제 학이 되었고 임진년(1592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해 4월에 왜란이 일어났으며 평양 대동강에서 일본인 현소 등과 담판을 지었으며, 침략의 불의함을 통매하고 왕명으로 요동에 가서 제병에 노력하고 명나라 병사가 내려왔을 때는 접반사가 되어 나라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무술년(1598년)에 우의정, 신축년(1601년)에 도체찰사, 임인년(1602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광해조에 영창대군 옥사가 간신들의 농간으로 야기됨에 직언으로 극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한지 수일에 병을 얻어 졸하니 나이 53세였다. 시는 문익공이다. 김홍민(金弘敏) 자는 임부요, 호는 사담이며 본관은 상산이다. 집현전 부제학 상직의 6대손이며, 옥과 현감 범의 아들이다. 중종 경자년(1540년)에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총명하였다. 선조 경오년(157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론을 시작으로 수찬, 응교, 집의, 청주 목사 등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에는 보은에서 창의하여 6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고, 충보군이라 이름 하여 상주의 적이 호서로 오는 길을 막았다. 벼슬길에 있을 때는 도리로 행하고 집 안에서는 효도와 우애와 화목으로 일생을 지냈으며, 『주서절요』, 『근사록』, 『소학』 등을 깊이 연구하였고, 갑오년(1594년)에 졸했다. 홍여하(洪汝何) 자는 백원이요, 호는 목재이며 관은 부림이니 문광공 홍귀달의 5세손이요, 대사 간 호의 아들로 1620년에 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우복 정경세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큰 선비가 될 것이다”고 하였는데 효종 갑오년(1954년)에 등 과하여 검열, 전적, 정언, 좌랑, 사간을 지냈다. 정언으로서 왕의 언동을 간하니 효종이 가납하였다. 그 뒤로 당로자들의 꺼림을 받아 고유 찰방에서 파직되었다 무술년(1658년)에 경성판관으로 부임하여 어진 정사를 폈으며, 을해년에 성학 치도의 요를 상소하고 병마사 권우의 무고로 황간에 유배되었다 그다음 해에 방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15년을 후진을 양성하는 데에 전념하였다. 사서에 통하고 주서에 전심하여 그 식견을 따를 이가 없었다. 숙종이 병조정랑에 특제하였으나 병이 중하여 나아가지 않고 졸하니 나이 55세였다. 저서로 『사서발범구역』, 『주역구역』, 『휘찬려사』, 『동사제강』 등 많이 있다. 이구(李榘) 자는 대방이요, 호는 활재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효령대군의 8세손이며 정랑 광 흡의 아들이다. 광해 계축년(1613년)에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제자백가서』를 탐독하다 외조부 칠봉 황시간의 권유를 받고 성현의 학문을 탐구하게 되었다. 정주학과 퇴도학에 전념하여 과거를 버리고 산간에서 후진에게 이기의 진수를 논강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갑오년(1654년)에 졸하니 42세였다. 이만부(李萬敷) 자는 중서요, 호는 식산이며 본관은 연안이다. 가은 심의 증손이요 박천옥의 아 들이다. 현종 갑진년(1664년)에 출생하였다. 정주학을 탐구하고 혁혁한 집안이면서도 분화를 멀리하고 오직 성학에만 몰두하여 저술에 힘쓰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남긴 저서는 지금까지 자손이 보관 전수하고 있다. 계축년(1733년)에 졸했다. 권상일(權相一) 자는 태중이요, 호는 청대이며 관은 안동이니 구학재 구의 증손이요, 증이판(贈 吏判) 심(深)의 아들이다. 숙종 기미년(1679년)에 출생하였다. 숙종 경인년(1710 년)에 등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로부터 이의(吏議) 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고 지중추에 이르고 기사(耆社)에 입(入)하여 찬수 당상이 되어 국사를 수찬하였다. 영조가 어필 16자를 하사 격려하였다. 영조 정미년(1727년)에 만경현령이었을 때 다음 해에 무신(1728년)의 난이 일어났는데 미리 민정을 살펴 적변이 일어날 것을 알고 상부에 보고하고 성지를 수축하며 유비무환의 대비를 하였으므로 경내가 무사하였다. 고향에서는 퇴계 선생을 사법(師法)으로 하여 이기호발(理氣互發)을 논하고 경연에도 첨하였다. 저술로서 『근사록집해』 등 여러 권을 남겼으며, 영조 기묘년(1759년)에 졸하니 수가 80세였고, 시호는 희정(僖靖公)이다. <저작권자 ⓒ 브레이크뉴스 대구경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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