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여 귀천 후 목 놓아 통곡해줄 이가 곁에 있는가? 죽음이란 마지막 길을 기꺼이 함께 해줄 이를 갖고 있는가? 만약 둘 중 하나라도 있다면 이번 생(生)은 절대 헛된 게 아니다. 이미 의미 한 자락을 쥔 것이다. 크나 큰 축복이다. 물론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각자 다른 지극히 주관적 단상이다. 한마디로 단정 짓긴 어려우나 개인적으론 잘 살은 인생이라 본다.
반면 살아생전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크나큰 ‘공덕’이다. 신(神)의 사랑은 결국 ‘자기희생’으로 귀결되는 탓이다. 선악이 공존하듯 세상역시도 좋은 이와 나쁜 이가 혼재된 채 돌아간다. 남에게서 ‘득’만 취하려는 이가 있는 반면 기꺼이 희생하는 이도 있다. 누군가를 위해 묵묵히 선업의 공덕 쌓기를 통해 신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이도 있다. 세상은 이런 이들로 인해 ‘신의 사랑’, 그 균형추가 유지되는지 모른다. SBS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를 자주 본다.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세상에 대한 ‘희망’ 메시지를 통해 가끔씩 치솟는 삶의 괴리를 희석시켜주는 탓이다. 이번엔 반신불수 아내를 트럭에 태워 같이 폐품수집 다니며 돌보는 한 남편, 그 부부의 일상이다. 60대의 연로한 남편은 그 아내가 자신의 목숨 보다 귀하다 한다. 말뿐이 아니다. 24시간 아내를 묵묵히 돌보며 직접 행한다. 그저 그렇게 된 게 아니었다. 아내는 20여 년 간 시부모를 봉양했다. 또 남편이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해줬다. 남편을 존경하고 따랐다. 그런 아내가 어느 날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남편은 그 충격을 말로 못한다 했다. 아내는 그 후 당뇨 등 복합증세로 건강이 피폐해 졌으나 남편의 보살핌으로 현재는 다소 호전된 상태로 보였다. 그렇다. 사랑은 그렇게 말로 아닌 맘을 행동으로 표현하며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서로에게 부족한 절반을 말없이 상대에게 채워주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끔씩 치솟는 본질적 공허함 역시 사랑 앞에선 맥없이 허물어진다. 어쩌면 유일한 극복 도구이자 ‘의미’일지 모른다. 사랑이 충만하면 공허함과 괴리가 파고들 틈이 없다. 수많은 인연의 틀 중 부부 역시 그 사랑을 서로에게 실현할 기회의 장이다. 기꺼이 서로에게 한 편이 돼주는 것이다. 하지만 때론 상대에게 자기희생과 배려 등을 통한 ‘공덕 쌓기’보단 ‘득’을 보려 하거나 섣부른 ‘이기’로 그 귀한 연을 가차 없이 흔들거나 허문다. 작금의 한국사회에 팽배한 ‘인연’ ‘결혼’의 득실논리도 사랑의 본질을 뒤흔든다. 이는 세계 수위의 이혼율로 이어지면서 이 사회를 위협중이다. 또 마냥 좋게 그 귀한 ‘연(緣)’을 매듭 하는 게 아닌 어떤 이는 상대에게 씻지 못할 상흔을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일부라 믿고 싶다. 최근 함께 자살한 행복전도사 고(故) 최윤희 씨 부부를 보면서 ‘일부’란 생각은 더욱 굳건해 진다. 부부가 아무리 사랑한다 하나 그렇게까지 함께 극단적으로 동시에 세상여행을 마치긴 어렵다. 세상 어느 남자가 그 남편처럼 아내와 함께 기꺼이 목숨을 끊을 수 있겠는가. 쉬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냥 그들 스스로의 선택이며 그 절박함은 그들만이 알 일이다. 그런데 최 씨 부부 귀천 후 뒤따르는 말들이 무척 난무한다. 생전 그들에게 도움하나 준 것 없는, 아무 상관도 안했던 이들이 갑작스레 그들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낸다. 직접 경험조차 않거나 그들을 잘 알지도, 무슨 말 못할 속내가 있는지 조차 모르는 이들이 무책임한 의견과 추정들을 뱉어낸다. 일부는 애도는커녕 비난해 섬뜩하기조차 하다.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가. 또 같은 상황이라면 그들처럼 선택하고, 그럴 수 있는 지 되묻고 싶다. 가끔씩 이런 상황에 접하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업(up)하려 해도 재차 나락으로 기운다. 사람들이, 세상이 참 살벌하고 무지막지 하단 생각이 든다. 화마저 일려 한다. 어쨌든 사람이 다신 돌아오지 못할 마지막 길을 떠났다. 그냥 조용히 명복을 빌어주는 게 아직 세상에 남은 사람으로서 최소 예의다. 쉽사리 판단하고 추정하는 건 망자에 대한 기본 예를 벗어난 것이다. 최 씨 생전에 일말의 영향을 받았던 아니든 그러는 게 아니다. 최 씨가 아무리 생전에 ‘행복전도사’였다 하나 자신의 병마에 따른 고뇌의 마지막 선택조차 세상의 허락을 요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물론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에 대한 우려도 상존한다. 인정한다. 하지만 그보다 그런 막다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 부부의 깊은 절망감과 선택을 그냥 애달파 해주며 안 되는 건가. 그냥 좋은 곳에서 편안한 안식을 취하길 묵상해주면 안되는가. 생전에 목 놓아 통곡할 인연이라도 맺었다면 모를까. 잘 알지도, 아무 관심조차 갖지 않던 이들이 왜 새삼 부산을 떠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뒤늦은 관심이 생겼다면 남겨진 자식들에 대한 걱정이나 보태는 게 차라리 인간적이다. 부모의 죽음을 것도 ‘자살’로 귀결된 충격을 접한 남겨진 자식들의 심경을 감히 말로 헤아리긴 어렵다. 누구에겐 것이 삶의 한 과정으로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또 어떤 이에겐 것이 살아 ‘지옥’일 수도 있다. 겪어본 바 필자역시 그랬다. 살아 ‘지옥’을 본다는 게 어떤 건지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그 참담함을 모른다. 사람들은 가끔 그렇다. 직접 겪지도 않은 일을 자신의 주관이나 주워들은 걸 조합해 마치 자신의 얘기처럼 아무렇지 않게 한다. 것은 동의는 구할 수 있으되 절대 맘 깊이 와 닿진 않는다. 진(眞)이 아닌 탓이다. 그래서 직접 겪지 않은 세상일이나 특히 부부 일에 제3자 입장에서 절대 결론적, 단정적 얘기는 있을 수 없다. 그냥 투영해보면서 스스로를 되돌아 비춰보는 ‘거울’로 삼으면 될 일이다. 그냥 맘속으로 묵상하고 혹여 자신을 되돌아 반성케 하거나 좋은 걸 깨달았다면 직접 말없이 행하면 될 일이다. 몸 불편한 아내를 자신의 분신처럼, 자신보다 더한 귀함으로 돌보며 받은 사랑을 묵묵히 되돌리고 있는 초로의 남편을 보며 ‘사랑’ ‘부부’의 의미를 재차 묵상하며 각인한다. 최 씨 부부를 생각하면 ‘사랑’도 ‘첨과 끝이 같은 신의’란 소신을 재차 다진다. 아직 세상에 머문 이들 중 과연 최 씨 부부와 같은 입장에 섰을 때 그 남편처럼 기꺼이 마지막 길을 함께 할 수 있는지, 그런 이가 현재 있는지, 또 곁에 있는지 되돌아 볼 일이다. 것은 진정한 자기희생으로 승화된 ‘신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이들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혹여 그리 하지 못했거나 그럴 이가 곁에 없다면 불행한 일이다. 연습조차 허용 않는 단 한번뿐인 삶에서 진정한 ‘의미’란 그런 ‘사랑’ 하나 이루는 게 아닐까. 최 씨 부부는 이미 그 의미를 이뤘고, 초로의 남편과 반신불수 아내 역시 그 의미의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 그들은 이미 모든 걸 가졌기에 아무 여한이 없을 거란 생각이다. <저작권자 ⓒ 브레이크뉴스 대구경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많이 본 기사
|